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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우 작가의 신간 을 읽었다. 작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굳이 지면 위에 옮겨 적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왔느냐 고 묻는다면 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 이야기 끝에 그래서 나는 원하는 삶을 살고 있고, 그러므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어디선가 인생이 한 번 꼬였는데(이 꼬이다 라는 표현도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꼬인 인생이란 대체 어떤 인생일까? 꼬이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그 원인을 생각이 스칠 수 있는 표면보다 더 깊게 파고드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이후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불평을 털어놓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양 극단의 스펙트럼 위에는 이도저도 아닌, 꿈을 이뤘다고도 행복하다고도 할 수 없지만 딱히 불행하지도 않은 삶을 무난히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저마다 지니고 살아가는 인생 스토리는 다양하다. 풍랑을 만난 배처럼 잠시도 마음놓을 새 없이 위로 솟구쳤다 아래로 가라앉는 스펙타클한 삶부터, 폭풍우가 한 차례 지나간 뒤의 맑게 개인 하늘처럼, 깨끗이 닦아놓은 거울처럼 잠잠하고 고요한 수면을 유지하는 대양 같은 삶까지. 우리의 삶에 파동을 불러오는 사건, 그것으로부터 촉발되는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전개 원리는 무엇일까? 무엇이, 혹은 누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이다. 그 답은 책의 이야기 속에 있다. 꼬인 인생을 펴서 다리미로 평평하게 다리기 위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마치 타인의 것처럼 바라보며 바로보기-바로쓰기-다시보기-다시쓰기 의 과정을 거칠 것을 제안한다.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와 같이 속에는 한 번쯤 기억해 놓고 꺼내어 써 볼 만한 삶의 지침들이 있다. 지침 이라는 단어가 좀 딱딱하고 고압적으로 들린다면, 나침반 혹은 지도라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으며 나침반만 확인하거나 지도만 들여다보는 여행자는 없을 것이다. 간혹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불길한 신호가 보일 때, 어쩐지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느낌에 빠질 때 우리는 이러한 물건을 꺼내어 제대로 잘 가고 있는지, 어디선가 길을 잘못 접어들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길을 계속 걷거나, 경로를 수정한다. 나도 을 읽으며 바로보기-바로쓰기 를 머릿속으로 해 보았다. 바로쓰기가 끝나는 순간 다시보기 가 자동적으로 시작된다. 그간의 삶이 정리가 되는 까닭이다. 나의 삶을 다른 누군가의 삶이라 생각하고, 그 스토리를 지면위에 (실제로든 가상으로든) 옮겨놓고 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진다. 그 발견의 순간이 다시 보기 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내 삶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해답 하나가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듯이 내 두 손에 착, 고운 소리를 내며 안착했고 나는 희망을 품은 채 다시 쓰기 를 해 볼 만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인생이라 불리는 꿈을 내 마음대로 꿔 보겠다는데,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그 꿈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다시쓰기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상상대로 인생이 펼쳐나가리라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에 포근히 감싸인 채 꿈꾸는 자들만이 갖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순간들이 인생에는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다음에 커서... 라고 말하는 어린이의 설레어하는 마음, 미래에 대한 의심 없음의 상태(그것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용기라는 덕목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를 우리는 한 번쯤 겪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자주 겪으면 겪을수록 좋은 것이다. 매일 조금씩 좌절하며 사는 우리들이 마음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먹는 비타민이라고나 할까. 하루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 그도 안된다면 일 년에 한 번(주로 새해) 이라도 이런 건강한 마음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작가가 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비록 패배할 지라도, 패배의 두려움 때문에 희망하지조차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까. 소설적 재미를 놓고 보자면 나는 가독성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소설은 양자역학이나 평행우주와 같은 여러가지 과학적 상상력이 버무려진 이야기임에도 훌훌 읽을 수 있는 page-turner 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사뭇 심오하고 묵직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이 소설의 덕목인 듯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주인공 문필우와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 또래인데 어쩐지 내 또래 같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는 다른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가끔씩 겪는 일이기 때문에 큰 결점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보니 문필우라는, 소설 우주 속에서는 피와 살과 영혼을 가지고 있을 한 인물의 삶과 내면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데에는 덜 신경을 쓰게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문필우 말고도 다른 등장인물들 (친구, 동창, 가족 등등...) 이 나와서 이야기가 좀 더 풍성히 펼쳐지기를 바랐는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필우 한 사람이 끌고 간다. 하지만 주변과의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끊고, 혼자 살아가는 재미에 빠진 젊은 사람들이 요즘에는 많으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을거라 본다. 을 읽으며 공감가는 구절이나 생각해 볼 만한 문장마다 표시를 해 두었는데 그 양이 꽤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부분만 따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오랜 시간을 거친 후에 세상에 모습을 내어놓은 문장들이 몇 개 있다. 그 문장들을 읽고 있노라면 문득문득 꿈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것이 시작이겠지만.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 (2008)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한 직후부터 깊디깊은 침묵과 수련의 시간을 걸어온 작가 박상우가 8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비밀 문장 (문학과지성사, 2016)을 상재했다. 이 작품은 한 소설가의 영혼을 끝 간 데까지 밀어붙여, 실재 너머-의식 너머의 세계를 한국문학에 끌어온 기념비적 소설이라 할 만하다. 오래도록 ‘삶’의 근원과 ‘문학’의 존재 의미를 화두로 품어온 작가는, 자신의 인생 역정을 토해내듯 이 소설에 쏟아놓는다. 소설 말미에 수놓인 방대한 ‘참고문헌’에서 보이듯 엄청난 학습의 시간을 감내하고, 무섭도록 무거운 소설가로서의 책임을 견딘 결과물이다. 그렇게 영성과 과학, 철학과 문학이 관류하며 만나는 한 지점에서, 비밀 문장 은 빅뱅하듯 탄생했고, 이제 한국문학사에 던져졌다. 이 낯설고도 위험한 소설이 당신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생에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스토리의 세계로, 스토리코스모스의 우주로 항진하게 될 것이다.
비밀 문장 9
[발문] 낯설고 위험한 소설 앞에서/ 홍정선(문학평론가) 314
작가의 말 320
참고문헌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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